2017.02.24 (금)

  • -동두천 -1.0℃
  • -강릉 0.5℃
  • 서울 -1.7℃
  • 흐림대전 2.2℃
  • 흐림대구 4.4℃
  • 박무울산 6.3℃
  • 흐림광주 4.3℃
  • 연무부산 7.6℃
  • -고창 4.1℃
  • 흐림제주 6.8℃
  • -강화 -0.6℃
  • -보은 1.5℃
  • -금산 2.3℃
  • -강진군 5.6℃
  • -경주시 4.6℃
  • -거제 7.3℃

국내여행

<신년특집=백령도기행②>장산곶과 황해도 연안은 초기 기독교 선교사들의 놀이터

  

백령도는 빼어난 자연 경관을 자랑하는 관광지로서 황해도 장산곶을 마주보고 심청전의 인당수가 가까이 있어 심청전의 유적지로도 유명하다.

섬의 동쪽 끝에는 심청각과 함께 어릴적 동화속에서 읽던 심청이의 동상이 세워져 있어 전통적인 효행사상을 강조하고 있다

심청이가 치마를 들어 올리고 물속에 뛰어드는 순간의 모습이 특이하다. 차라리 의연히 먼 바라를 응시하며 천국과 지옥의 한계에 선 인간상을 구현하는 게 차라리 낫지 않았을까.

백령도에는 한국 기독교(=개신교) 역사상 두 번째로 세워진 중화동 교회가 있다.  이와 더불어 백령 기독교 역사관 등 여러 초기 선교 유적지가 잘 보존되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지난 2001년 옹진군과 기독교계가 공동으로 건립한 기독교역사관은 30평 규모의 현대식 건물로 총 38000만원의 사업비가 소요됐다. 특히 외부 시설보다 초기 중화동교회 모습, 최초 백령도 복음전파 장면, 서양선교사 성경전달 재현, 토마스 선교사 방문 모습, 언더우드 선교사 세례 집례 등 내부 전시물에 비중을 두고 꾸며져 초기 선교 현장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는 평가다.

조사에 따르면, 한국의 기독교(개신교)는 지난해를 기점으로 불교를 제치고 국내 최대종교가 되었다. 201612월 통계청이 발표한 <2015년 인구주택 총조사 표본 집계 결과>를 보면 기독교 인구는 지난 10년간 1.5% 늘어 19.7%를 차지했다.

반면 불교는 같은 기간 7.3% 줄어 16.5%로 떨어졌고, 카톨릭(천주교) 역시 2.9% 줄어 7.9%로 감소했다. 기타 잡교 인구 역시 줄어드는 추세를 보였고, 다만 무()종교 인구가 절반을 넘어 56.1%로 급격히 증가했다.



그렇다면 한국의 기독교는 언제 들어온 것일까. 카톨릭(천주교)은 1592년 임진왜란과 함께 일본군을 종군한 포르트갈 선교사들에 의해 국내로 들어왔다는 것이 정설이다. 이후에도 19세기까지 중국을 통하여 끊임없이 전해지면서 대원군의 쇄국정책 등으로 수십차례의 탄압을 받아 많은 피를 흘렸다.

그러나 기독교는 19세기 이후 비교적 근세이후에 국내에 들어와 연륜이 200년을 채 넘지 못한다.

일반적으로는 기독교는 대한제국 시절 알렌이나 언더우드 등 미국인 선교사가 국내에 들어오면서 전해진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그 이전부터 꾸준히 국내 시장 진출을 꾀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백령도와 황해도 서쪽 장산곶 일대를 중심으로 한 대동만은 초기 기독교 전파의 무대가 되었다.


 


이는 이 지역이 중국 산동반도나 화북지역과 연결되는 항로상에 위치해 있어 중국에 당도한 영국과 프랑스, 독일의 선교사들이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주요 지정학적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백령도 기독교 역사는 1816년 맥스웰(Murrey Maxwell) 대령이 이끌던 선단에 클리포드(H.J.Clifford) 해군 대위가 자비로 승선하여 각 지역의 언어를 수집하고 선교 가능성을 탐사하기 위해 백령도에 정박하여 성경을 나누어 준 것이 시초이다.



그 후 1832년 독일태생의 유태인 칼 귀출라프(Karl F.A.Gutzlaff)가 영국 런던 선교회의 파송을 받고 동인도 회사 무역선에 통역 겸 선상 의사로 승선하여 개신교 선교사로는 처음으로 조선에 발을 들여 놓게 되었다. 그는 클리포드의 비망록을 기초로 하여 백령도에 정박해 있으면서 감자 재배법과 포도주 만드는 법을 알려주고 주기도문을 한문과 한글로 번역, 선교활동을 전개하였다. 그 후 여러 선교사들이 조선의 본토에 입국하기 전 백령도에 임시 정박하여 선교활동을 펼치면서 조선의 사정을 알아보는 '베이스캠프' 역할을 했다.

특히 1865년에는 영국 웨일스 출신의 토마스 선교사가 서북해안을 찾아와 백령도를 비롯 황해와 평안도를 순회하며 전도를 했다. 이듬해 그는 유명한 제너럴 셔먼호를 타고 백령도를 거쳐 평양에 들어갔다가 조선관헌에게 잡혀 26살에 순교했다. 이로써 토마스는 이 땅에 복음을 들고 찾아와 순교한 첫 번째 개신교 선교사로 기록됐다.




한국의 개신교는 북쪽에서도 전래되었다. 1873년에 스코틀랜드 출신의 존 로스(Ross) 목사가 만주 전도여행 중 서간도의 조선인 부락을 방문하였고, 3년 뒤에는 조선 최초의 개신교 수세자(受洗者)인 백홍준·이응찬·이성하·김진기 등이 만주 우장(牛莊)에서 머킨타이어 목사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그러던 중 1875년부터 예수 성교(聖敎) 문답서를 비롯 신약성서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을 번역하는 일에 로스 목사와 협력하던 서상륜은 마침내 1884년 초 황해도 송천(솔내소래로 개명)에 한국 최초의 개신교회인 소래교회를 세워 성서를 반포하기 시작했다.




백령도 중화동교회는 1898년 백령도 진의 첨사 자문역으로 참사 벼슬을 지냈던 허득이 복음의 씨앗을 받고 그 곳에 유배 되어온 김성진, 황학성, 장지영 등과 함께 한학 서당에 세운 것이 단초다. 지금도 마을 주민들이 모여 예배를 보는 중화동 교회는 시기적으로 황해도 장연군의 소래교회에 비해 늦게 세워졌으나 초기 선교활동의 중요한 거점 역할을 하였음이 분명하다.

소래교회나 중화동교회는 모두 외국인 선교사가 아니라 조선인들 스스로의 손으로 세웠다는 데 역사적 의의가 있다. 이는 당시 조선인들이 봉건적 압제 속에서 신문명의 복음을 얼마나 애타게 그리워하였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특히 백령도는 한국 최초의 주재 의료선교사 알렌의 인천 상륙(1884920) 보다도 50여년이나 앞서 이미 복음의 씨앗이 뿌려졌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미국인 선교사 언더우드 목사는 1900118일 중화동교회를 방문해 조선인 7명에게 세례를 줌으로써 중화동교회의 초대 당회장이 되었다. 그는 황해도와 평안도 지역에서 성경과 찬송가 번역, 대한성교서회, 황성기독교청년회 사업 등으로 바쁜 일정에도 불구하고 1900926일경 평양을 출발하여 진남포, 은율, 풍천을 거쳐 황해도 소래에 도착했으며, 이후 6주정도 지나 백령도에 도착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처럼 백령도는 단순한 관광지일뿐만 아니라 19세기 한국 근대화 역사의 중요한 무대였으며, 더불어 초기 기독교 선교의 생생한 현장이었음을 알 수가 있다. 다시 말해 한국 기독교의 초기 선교 역사는 백령도를 빼고서는 이야기할 수 없다는 말이다.

백령도는 이후 중화동교회를 중심으로 기독교가 급속하게 발전하게 됐으며, 지금도 해병대 백령교회 등 군부대교회를 비롯하여 10개 교회가 복음을 전하면서 5천여 주민가운데 약 70%가 기독교도라고 한다.

그러다보니 지금도 아주머니 10명이 걸어갈 때 뒤에서 '집사님~'하고 부르면 한명만 빼고 다 뒤를 돌아다 보는데, 그 한 명은 바로 권사님이기 때문이란 우스개소리가 전한다.


 

 

/인천광역시(백령도)=강민규기자kotrin3@hanmail.net


관련기사











배너
배너
배너